1980년대 외모와 실력을 겸비하면서 이선희와 신인상을 두고 경쟁할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린 여가수가 놀라운 근황을 밝혀 화제가 되었습니다.
80년대 아이유로 불릴 정도로 유명세를 떨치며 온갖 광고를 섭렵한 이 가수는 돌연 자취를 감춘 뒤 속세를 떠나 비구니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 놀라운 사연의 주인공은 바로 가수 이경미입니다.
1962년 7남매의 맏이였던 이경미는 고등학생 때인 1980년 이봉조의 눈에 띄어 가수에 데뷔해 인기 드라마 ‘사모곡’의 주제곡을 부르며 인기 가수로 등극했습니다.
18살의 어린 나이에 뛰어난 노래실력, 미모를 모두 갖춘 이경미는 가수 뿐만 아니라 잡지 모델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고 하는데요,
당시 광고 한편에 천만원 수준의 출연료를 받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경미는 돌연 자취를 감추었는데요,
당시 언론은 이경미가 행방불명을 당했다고 보도했고, 가족들도 이경미를 찾아 나섰지만 아무도 그를 찾지 못했습니다.
특히 이경미는 KBS 예능프로그램 ‘100분 쇼’ 생방송 직전에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모두를 충격에 빠트렸습니다.
한참 후 이경미는 절에서 스님이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경미는 생계를 위해 야간업소에 출연하면서 조직 세력의 다툼에 협박을 당하는 등 끔찍한 일을 겪었다고 털어놨습니다.
한 방송에 출연한 이경미는 “그때는 연예인에게 오라면 무조건 가는 분위기였다. 궁정동 쪽으로 부르면 무조건 가야 했다”고 고백하며 박정희 전 대통령을 피해 행방불명을 자처했다고 이유를 밝혔는데요,
이어 “차츰 마음이 병들어 갔고 내 스스로가 장난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오죽했으면 죽고 싶을 정도였다”고 말했습니다.
하루에 야간업소를 아홉 번까지 뛰며 노래 한번에 집 한 채 정도의 출연료도 받았다는 이경미는 활동 당시 “노래만 부르면 된다는 생각과는 달리, 노래를 부르고 난 뒤 자리로 와달라는 멘트가 있었다”라고 밝히며 화려한 모습 이면의 어두운 연예계 뒷이야기를 밝혔는데요,
당시에도 속이 답답하거나 힘들 때 항상 절에 갔다는 이경미는 “어떤 절이든 가면 마음이 평온했다”고 털어놨습니다.
하지만 “7남매의 맏이로 가장 노릇을 했기에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다”라며 “어머니가 큰 스님이랑 멱살잡이도 했다. 날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난 한 번 더 찾아오면 죽을 거라고 단호하게 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의 반대로 출가를 했다가 속세로 돌아오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는 이경미는 삭발한 상태에서 가발을 쓰고 무대에 선 적도 있다고 밝혀 놀라움을 자아냈는데요,
생방송을 펑크내고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그때 생방송에서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방송국을 뛰쳐나왔다. 당시 PD가 나 때문에 힘들었을 거다. 정말 죄송하다”고 덧붙였습니다.
당시 제정신이 아니었다며 자신을 압력밥솥에 비유한 그는 “그 당시에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압력밥솥이 처음에는 차츰차츰 뜨겁게 하다가 어느 정도 확 압이 차면 팍 터진다”며 “내가 그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도망치는) 행위를 한 거다”고 털어놨는데요,
그 길로 북한산에 있는 절에 간 이경미는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머리를 깎은 후 너무 좋아서 화장실에서 춤을 췄다”고 말해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또 “정신적 허기가 있고 이 상황이 싫고 마음의 상처가 있을 때마다 출가 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하루 이틀 생각한 건 아니었다”며 오랫동안 고민 끝에 스님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현재 이경미는 보현스님이라는 법명을 받아 불자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이처럼 기구한 삶의 끝에 불자가 된 이경미는 ‘보현스님의 카르마’ ‘보현스님의 나는 행복합니다’ ‘보현스님의 즉문즉답’ 등 콘텐츠를 통해 불교의 진리를 전파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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