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창업주인 이병철의 손자이자 이건희 회장을 이어 삼성의 회장이 된 이재용은 삼성가의 손자답게 화려한 학력을 자랑합니다.
경기초, 청운중,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일본 명문 게이오기주쿠대학 MBA를 취득 후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는데요,
학창시절 줄곧 성적이 상위권이었던 그의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은 “재용이는 공부 잘 하고 친구관계도 좋은 평범한 아이인 것으로 기억한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 친구들을 자주 집으로 초대하곤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재용이와는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반장모임을 통해 쭉 보아왔지만 늘 차분하고 말수도 별로 없는 조용한 친구였다”라며 “그저 좀 잘 사는 집 아들이겠거니 생각했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은 몰랐다”고 밝혔는데요,
학창시절 재벌이라고 으스대는 것 없이 사람을 좋아하고 두루두루 잘 지내는 모습으로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병철 회장의 “경영학은 나중에도 금방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을 이해하는 폭을 넓힐 수 있는 인문학을 전공하라”고 권유해 동양사학과에 입학했다고 밝혔는데요,
외사촌지간인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도 서울대학교 서울사학과에 진학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입니다.
이재용의 부모인 이건희, 홍라희 부부의 자녀교육 대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재벌집 도련님하곤 상당히 거리를 두던 이재용은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요,
그가 학적부에 아버지 직업 적는 곳에 아버지 이건희의 직업을 ‘회사원’이라고 적은 사실이 밝혀지며 큰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친구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던 이재용은 ‘남에게 폐 안 끼치고 누구한테도 싫은 소리 듣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모범생’ 이미지였다고 하는데요,
80년대 당시 서울대 인문계약 학과의 분위기가 대다수 그랬지만 그가 졸업한 동양사학과는 특히 운동권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을 공부하려고 오는 학생들도 많았기 때문에 학과 자체가 급진적인 운동권적 성향이 강했다고 하는데요,
이재용 역시 같은 과 선배와 함께 시위에 참가해서 최루탄 맛을 경험하기도 하고, 전방입소 거부 투쟁에 동참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당시 대학생들이라면 낯설지 않은 풍경이긴 하지만 재벌 3세가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행보였는데요,
동기들과의 여행이나 MT에도 빠지지 않고 여러 논쟁과 토론에도 빠짐없이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대학교 시절 그는 골프, 승마에도 소질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특히 승마는 상당 기간 승마 국가대표 선수로도 활약한 그는 국제 대회에서 수상한 경력도 있다고 합니다.
서울대 재학 시절인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15명가량인 한국 승마 국가대표의 일원으로 활약하다 95년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대표를 그만뒀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까지도 고교 동창들과 소소하게 만나는 것을 즐긴다고하는데요,
캐주얼 차림으로 경호원이나 그룹 관계자를 대통하지 않고 나와 삼겹살에 소주를 즐긴다고 합니다.
그와 친분이 있는 친구는 “고기집에서 사람들 눈에 띄어도 별로 의식하지 않는 편이다. 다만 아무래도 얼굴이 알려지다 보니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자리를 잡아 벽쪽을 보고 등을 지며 앉곤 한다”고 그에 대해 말했는데요,
또한 “재용이는 친구 부모님이 상을 당했을 때 바쁜 일이 없으면 꼭 참석한다. 워낙 어려서부터 조심하다 보니 남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언론에 자신이 노출되는 것을 매우 꺼리게 되며 사람을 멀리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재용이 평소 편하게 지낸 학교 선배인 기자에게 술집에서 술 한잔하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는데 원래 의도와는 다른 기사를 선배가 내보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크게 실망한 이재용은 언론 자체를 기피했다고 하는데요,
또 한번은 일본의 전자회사 임원과 술자리를 함께 하고 나오는데 파파라치가 술집에서 나오는 장면을 찍고 거액을 요구하여 황당했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