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계 대표 장수 그룹 코요태는 1998년 데뷔하여 지금까지도 활발히 활동중인데요,
멤버들의 개인 사정으로 인한 교체가 있었지만 해체 없이 현재까지 활동 중인 국내 최장수 혼성그룹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멤버 김종민, 신지, 빽가는 2004년부터 20년 넘게 활동 중으로 가족보다도 더 애틋한 사이라고 하는데요,
메인보컬 신지의 데뷔 당시 나이는 고작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활동한지 실감이 나네요.
사건사고를 일으킨 멤버없이 꾸준히 활동한 코요태에게도 해체 위기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바로 멤버 빽가의 뇌종양 투병 소식이었습니다.
한 예능에 출연한 코요태는 빽가의 20대 후반 뇌종양 투병 시기를 회상하며 가장 힘들었던 시기임을 고백했는데요,
빽가는 “나는 내가 너무 건강하다고 믿고 살았다. 무기력한 것도 피곤함으로 느꼈다. 중간 중간 정신을 살짝 잃을 때도 별 거 아니라 생각했다. 그러다 교통사고가 나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CT 촬영을 권하더라. 이후 MRI까지 권유 받았다. 이후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며 뇌종양 판정을 받았던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그는 “두개골 뼈를 잘라내고 수술했다. 지금은 너무 건강해졌고 멤버들이 옆에서 힘을 많이 줬다”며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이어 빽가는 “코요태 활동을 하는 것이 팀에 누를 끼치는 것 같아 탈퇴를 이야기했지만 멤버들이 항상 함께하자고 날 이끌어줬다. 아프고 나서 난 좀 더 밝아졌다”고 밝혔는데요,
신지 역시 “해줄 수 있는게 없으니 마음이 아팠다. 그 와중에 빽가가 코요태를 탈퇴하겠다고 말했고 그때 김종민이 얘기를 잘 했던 걸로 알고 있다”며 “김종민이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빽가는 팀에 늦게 합류하고 노래도 거의 하지 않았기때문에 수익 분배를 적게 가져갔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투병으로 지출이 많고 부담이 커질 빽가를 생각해서 4:3:3으로 수익구조를 변경했다고 합니다.
코요태를 오랜기간 이끌어 온 원년멤버임에도 불구하고 새로 들어온 빽가에게 자신의 수입을 양보하여 똑같이 가져간 것인데요,
빽가는 “종민이 형이 내꺼 이만큼 더 줄테니까 탈퇴하지말라”고 배려해준 덕분에 지금까지 코요태를 할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빽가의 말을 들은 신지는 놀라며 “당시 저와 김종민 씨는 똑같이 나눠 가졌다. 빽가 씨가 팀에 조금 늦게 들어와서 수익이 덜 돌아갔었다. 그러다 김종민 씨가 저한테 ‘네가 코요태 원년 멤버이기도 하고 노래할 때 비중이 많으니까, 네가 4를 가져가고 우리가 남은 걸로 3대 3을 하겠다’고 했었다. 둘 사이에 뭔가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고 말했는데요,
수익까지 양보한 김종민은 빽가에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힘내야 한다”고 말하며 함께 힘든 시간을 버텨주었다고 합니다.
빽가는 가장 힘들었던 투병 생활로 인해 멤버들에 대한 고마움과 스스로도 코요태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는데요,
현재 그는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고 빼어난 사업수완을 가지고 손대는 사업마다 수십억의 수익을 올리며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빽가의 첫 사업은 옷가게였다고 하는데요,
자신의 옷을 처분하기는 아까워 중고 옷들을 팔며 첫 사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어 그는 “꽃집에 선인장을 안팔아서 선인장을 팔아야 겠다. “생각했고 선인장을 “어디다 심어서 팔까하다 수프 캔에 심어 팔아야 겠다”고 생각해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캔에 심어 팔아서 소위 대박이 났다고 하는데요,
이후에도 고깃집, 핑퐁펍, 선인장 카페 등을 낸 빽가는 한 방송에 나와 “고깃집은 한 달 1억 5000만원인데, 주말만 7~800만원을 벌고, 사진 작가 수입 2000만 원, 펍은 월 매출 3000만 원, 선인장 카페는 1500만 원 정도 된다”라며 구체적인 수입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제주도에 5000평 규모의 카페를 열어 이렇게 벌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하는데요,
자신은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했을 뿐인데 그런 부분에서 수익을 거뒀다며 “운이 좋았던 것 같다”고 사업 성공의 소감을 밝혔다고 합니다.